식당경영 개선전문가 식당밥일기의
성공한 외식인 생생스토리 11편
이제는 외식도 건강식의 시대
<일월정>, <일월정 F&B> 전주연 대표를 만나다!
아이 업고 시작한 장사
고교를 졸업한 전 대표는 몇 해 지나지 않은 23세에 결혼해 곧이어 큰딸을 낳았다. 해산한 몸으로 직접 생계를 챙겼다.라일락 향기 짙어가던 1983년 5월, 손수레를 끌고 토스트 장사를 시작했다. 3개월간 번 돈으로 대구 복현동 경북대학교 인근에 아주 작은 점포를 얻어 분식집을 차렸다.
시골 출신답게 돈 벌려는 상심보다 농심으로 손님을 대했다. 라면 찾는 손님이 오면 얼마나 배고플까 싶은 마음에 최대한 빨리 끓여 제공했다. 돈 없는 학생에겐 그냥 끓여주기도 했다.
그의 정성이 통했는지 손님은 꾸준히 늘었다.💕 신생아를 업고 혼자 일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가게 근처에 빈 점포가 나왔다. 주변에 갈빗집이 없어 갈빗집을 하면 잘될 것 같았다. 132㎡(40평) 규모의 새 점포를 찜해두고 분식점을 운영하면서 갈빗집 공사를 벌였다.
1987년 가을, 공사를 마무리하고 갈빗집을 열었다. 자신감 하나로 시작했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갈빗집 핵심 인력인 주방장이 8개월 만에 나가고 그 뒤로 몇 차례 주방장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전 대표는 조금씩 어깨너머로 그들의 조리법을 익혔다. 👩🍳
예상대로 갈빗집은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규모여서 근처 방직공장을 비롯한 단체 회식 손님이 줄을 이었다. 1인분에 2,000~2,300원이었던 돼지갈비는 불티나게 팔렸다.
바쁜 와중에 둘째 아기가 태어났다. 출산하기 전날 밤에도 늦게까지 일하고 다음 날 해산했다.
3년간 정신없이 갈비를 팔고 나니 서른 살이 되어 있었다. 집을 장만할 만큼 돈도 벌고 외식 업소 운영 노하우도 얻었다.
그러나 번 돈의 대부분은 남편 사업자금으로 들어갔고 점차 빚이 불어나는 상황이 됐다.
아이 둘과 현금 12만 원, 그리고 남편의 빚을 떠안고 혼자가 됐다. 남은 재산은 모두 남편에게 넘겨줬다. 🥀
나중에 남편으로부터 500만 원을 되돌려 받아 당장의 생활비와 생계 대책을 세웠다.
없는 돈에 가게라도 얻으려면 외곽으로 나가야 했다.
원하면 소도 잡아주는 밥집
그 무렵 달성군에 공단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
‘달성공단에는 가게가 없어 파 한 뿌리 사 먹기도 어렵다’ |
이 말을 듣고 밥장사하면 잘될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현장 답사를 해보니 과연 듣던 대로였다.
전 대표는 허름한 빈 점포를 하나 얻어 인근 공사장과 농장 일군들을 겨냥한 식사 메뉴를 제공했다. 하루에 400~500인분이 팔렸다.
처음부터 대박이 났던 건 아니다.
그래도 불안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차피 손님은 올 것이라 믿었다. 열흘째 되는 날 네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첫 손님이었다.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고 돌아간 이들이 다른 동료들에게 추천했다.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손님 숫자가 불이 번지듯 늘어났다. 다녀간 손님들이 불쏘시개 구실을 해준 것이다
얼마 지나자 주변에 경쟁 식당들이 생겼고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가 점포를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2년 8개월 만에 식당을 근처로 옮기고 <영성식당>이라 이름 붙였다. 이전 후에도 인기는 여전했다. 매출의 80%가 공장과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농민들의 배달 식사였다.
주문량, 배달 거리, 난이도를 따지지 않았고 식사 시간이 지난 주문도 배달해줬다. 한결같이 성실하게 배달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샀다. 또 고객의 기호나 요청을 최대한 수용했다.
기업체 행사 음식도 차려주고 심지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해체해 단체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두 아이를 재워놓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 |
“새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마당을 쓸며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 예불드리듯 그것은 내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기도 했다. 쓸면서 새로운 하루를 열어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우리 음식 먹은 손님들이 건강하고 잘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두 손 모았다.” |
시련과 기쁨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외지에서 들어와 독주하는 전 대표를 주변에서 곱게 보지 않았다.
시골 동네 특유의 배타적 분위기가 그를 괴롭혔다. 더 괴로웠던 건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빚이었다.
결국 빚쟁이들과 담판을 지었다. 지금 가진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나눠 갖고 끝낼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전액을 받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빚쟁이들은 후자를 택했다.
전 대표도 약속대로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최대한 지출을 줄이고 돈을 모았다. 거액의 빚을 모두 갚은 건 서른아홉이 되어서였다.
10년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이 무렵 소원이었던 임대 아파트에 입주해 감동이 배가됐다.
더는 두 아이를 쥐가 우글거리는 낡은 방에서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음식에는 정성이 필수 요소
건물주에게 쫓겨나는 설움을 당하자 10년 안에 내 건물에서 장사하겠다는 새 목표가 생겼다.
목표를 9년 만에 이뤘다. 2005년, 지금의 자리에 건평 200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짓고 <일월정>이라는 간판을 단 한정식 집을 출범시켰다.
☁️ “돈만 생각하면 계속 식당을 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외식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오랜 소망이 있었다. 그 꿈을 실현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현실에 얽매여 아등바등 살아가는 엄마 모습을 내 아이들에게 더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일월정>을 개점하면서 전 대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번데기 등껍질을 깨고 우화하는 나비처럼.
개점을 전후해 약 5년간 외식업 관련 강의와 조리 공부에 매진한 결과였다. 학습을 통해 조리 기법은 물론, 외식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전보다 훨씬 넓고 깊어졌다.
단지 열량 공급원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가 담긴 문화 결집체로서의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갈수록 조리법이 점점 간편화되거나 생략되곤 한다. 반드시 들어가야 할 식재료도 하나둘 빠진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음식이 갖춰야 할 필수 요소가 결여되고 있는 요즘 세태를 전 대표는 안타까워한다.
음식이 사료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만든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 담긴다는 점일 것이다. 이윤과 간편만 추구하면 정성이 들어설 자리가 좁아진다.
B2B 체계 갖추고 세계화 꿈꾸는 ‘독계탕’
그 고민의 일단이 독계탕(毒鷄湯) 개발로 이어졌다. 독계탕은 ‘해독 삼계탕’이란 뜻이다.
심하게 맵지 않은 창녕 육쪽마늘을 20일간 발효시킨 흑마늘이 핵심 재료다. 🧄 흑마늘 외에 슈퍼푸드로 평가받는 대마 씨, 엄나무, 황기, 대추를 4시간 중탕한 국물 등 3종 육수에 국내산 닭을 두 시간 삶는다. 독계탕은 부드럽고 맛있는 식사 메뉴이자 보약이다. 약식동원(藥食同源) 그 자체인 셈. |
독계 육수를 활용해 독계 설렁탕, 독계 갈비탕으로 메뉴를 확장했다.
2007년 개발해 특허까지 받은 독계탕은 ‘해독부터 보양까지’라는 <일월정> 구호에 걸맞은 간판 메뉴로 자리 잡았다. 🍲
이제 독계탕은 2대에 걸쳐 새로운 발전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엄마와 외식업 동업자로 성장한 장녀 최정빈 대표.
그는 어머니가 개발한 독계탕의 전국적 유통망 확보와 B2B 사업을 위해 최근 <일월정F&B>를 설립했다.
현재 온라인을 통해 밀키트 독계탕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장차 독계탕이 가진 맛과 기능성의 잠재력을 극대화해 병원, 단체, 기업 등과 직거래 함으로써 시장을 확대해나가겠다는 게 최 대표의 복안이다.
작년 7월에는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을 완공해 하루 5,000식의 독계탕 생산이 가능해졌다.
2023년에는 이커머스 플랫폼 영업의 활성화와 병원 환자식이나 기업체 단체급식 같은 B2B 사업을 본궤도에 올릴 예정이다. 미국과 베트남 한인 사회 진출도 타진하고 있다.
“전 국민에게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이고 싶었다. 앞으로 독계탕이 K-푸드의 위상을 높이는 대표 한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엄마로서 외식인 선배로서 전주연 대표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어머니가 키운 <일월정>을 <이성당>과 <성심당>처럼 자기 색깔이 분명하면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지역 명소로 가꾸고 싶다.” 💞 |
10편 - 입으로 맛보는 불꽃, 마제소바의 시작, <멘야하나비> 지동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