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 이야기 2편
: 반인이 먹던 서울식 추어탕
반인이 먹었던 추어탕, 추두부탕
🔗추어탕 이야기 1편에서 추두부탕을 먹었던 반인이 과연 누구였을지 궁금증을 남기며 마무리하였다.
‘반인’은 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비들이다. 청소하고,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를 챙기고, 성균관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 노비, 즉 하층민이었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고등 수학기관, 국가 공인 ‘대학(大學)’의 담장 아래 물을 채우고 호수를 만들었다. 즉 학교는 물로 둘러싸인 건물이었다. 대학, 성균관 등을 ‘반궁(泮宮)’이라 부르는 이유다. 🏯
반궁을 관리하는 이들은 '반인'이라 칭했고, 이들이 사는 지역이 바로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국왕의 허락 없이는 사법권도 함부로 행사할 수 없는 ‘반촌(泮村)’이다.
성균관은 장차 나라를 짊어질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더하여 성균관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러한 성균관을 반인들이 관리한다.
천한 신분이지만, 귀한 곳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반인들이다.
쇠고기 유통권을 장악해 부유해진 반인 🥩
조선은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부르고, 사용을 엄하게 금지했다. 한반도의 경제 상황이 나아지던 18세기 무렵부터 ‘금육’은 비공식적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쇠고기를 금하지만, 민간에서는 사사로이 쇠고기를 거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규합총서>에도 쇠고기 요리법이 등장한다.
반인들은 공자의 제사, 여러 성현의 제사 등을 모시고, 유생들의 식사를 챙기면서 쇠고기를 자주 만졌다.
쇠고기도 만져본 사람이 잘 만진다고, 19세기 초반 무렵에는 오래전부터 공식적으로 쇠고기를 만졌던 반인들이 한양의 ‘쇠고기 유통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천한 신분임에도 쇠고기 유통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해진다. ‘천한 신분의 부자’가 된 것이다. 🤑
부유해진 반인들은 상당한 정성을 들어가서 제법 가격이 높았을 ‘추두부탕’을 먹을 수 있었다.
단순 간결한 농촌식 추어탕, 밋구리죽
1편에서 말했듯, 추어탕은 농촌 지역형 추어탕(밋구리죽)과 서울식 추어탕(추두부탕)로 정착한다.
농촌 지역 형 추어탕, 밋구리죽은 미꾸라지를 삶은 다음 등뼈나 거친 부분을 걷어내, 곱게 갈아서 사용한다.
된장 베이스가 원칙이며, 더러 간장을 더하기도 한다.
밋구리죽 만드는 법 🍲
된장(또는 간장) 푼 물에 고운 미꾸라지 가루를 넣은 다음, 얼갈이 배추를 포함한 얼마간의 채소를 넣고 끓인다. 진흙을 아무리 뺀다 해도 비린 냄새는 나기 마련이기에, 남부 지역에서 잘 자라는 초피나무의 열매, 산초 가루를 넣어 비린맛을 잡는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제피 가루’, ‘젠피’ 등으로 부른다. |
이렇게 밋구리죽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미꾸라지를 갈아서 고운 가루만 사용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미꾸라지 추어탕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도 힘들 정도다.
밋구리죽을 맛보고 싶다면, 지금도 성업 중인 대구의 ‘상주식당’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공들여 만들어 팔던 서울식 추어탕, 추두부탕
추두부탕은 직접 만들어 먹기는 힘든 음식이다.
맑은 물이 있는 곳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고, 진흙을 빼내는 데만 일주일가량 걸린다. 또 하루에 두어 번 물을 갈아주어야 하며, 귀한 식재료인 두부, 기름을 사용하고 번거롭게 전을 부쳐야 한다.
🤔 과연 직접 만들어 먹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음식인 밋구리죽은 만든 이와 먹는 이가 같다고 봐야 하고, 추두부탕은 만든 이와 먹는 이가 다른, '저잣거리에서 파는 음식’으로 여기는 이유다. 직접 만든다해도 재료 준비, 조리 과정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서울식 추어탕의 특징 ①
: 매운맛을 내는 3가지 양념
오늘날에는 고춧가루와 산초 가루를 동시에 사용하지만, 원형 서울식 추어탕은 고춧가루를 사용했다. 산초 가루는 나중에 남부 지역에서 올라온 것이다.
추어탕을 만들 때 흔히 쓰는, 매운맛을 내는 양념은 세 종류로 호초,고초,산초이다. 모두 초(椒)로 표기한다.
1) 후추
후추는 원래 이름이 호초(胡椒)다. ‘호(胡)’는 오랑캐, 만주 등 북방의 민족을 뜻하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아랍 지역의 물산을 부를 때도 사용한다. 호주머니, 호마유(胡麻油) 등은 모두 아랍 지역의 산물이다. 호초도 마찬가지. 후추는, 남방의 산물로 조선 시대에는 오키나와 등을 통하여 동남아산 후추를 공물로 수입하여 사용했다. 수입품이니 상당히 귀했고, 민간에서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궁중에서도 후추를 귀하게 사용했고, 행사 때 사용한 후추 양을 일일이 기록할 정도였다. |
2) 고추
고추는 고초(苦椒)다. 먹기 힘들 정도로 맛이 쓴, 매운맛이다. 임진왜란(1592년) 무렵 수입되었다고 알려졌다. 널리 사용한 것은 19세기 이후다. 서울식 추어탕은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사용하여 상당히 맵고, 붉은색을 낸다. |
3) 산초
산초(山椒)는 한반도 자생종이다. 조선 시대에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한 매운맛 양념 재료였다. 특히 지리산 언저리에서는 지금도 쉽게 산초 기름을 볼 수 있다. 매운맛 양념 혹은 기름으로 사용했다. 농경 지역의 서민들은 된장+산초로 맛을 잡았고, 한반도 중부지방인 한양(서울)에서는 산초 대신 고추로 매운맛을 더했을 것이다. |
서울식 추어탕의 특징 ②
: 육수와 여러 고명의 화려함
서울식 추어탕의 육수는 양지와 곱창을 이용한다. 가격이 비교적 낮았던 곱창을 사용하면 깊은 고깃국물의 맛, 감칠맛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유부와 두부, 양파, 파 등 여러 채소류를 더한다. 버섯과 달걀도 넣을 수 있다. 서울 노포의 추어탕에서 다양한 고명을 비롯한 서울식 추어탕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노포 #1️ '곰보추탕' |
2011년 7월, 지금은 폐업한 서울식 추어탕 노포 ‘곰보추탕’을 방송촬영 목적으로 방문했다. ‘곰보추탕’은 1930년대에 개업하였고, 조명숙 씨는 창업자의 며느리로 50년 이상 ‘곰보추탕’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날 운 좋게도 주인 조명숙 씨(당시 71세)에게서 ‘곰보추탕의 레시피’를 적은 메모지를 얻었다. 📝
‘미꾸라지, 버섯, 양지, 두부, 양파, 대파, 호박, 고추장, 고춧가루, 밀가루, 유부, 계란, 마늘, 생강, 후추, 소금’ 등이 조 씨의 자필로 적혀 있었다.
[자필 메모지에 적힌 내용]
미꾸리 / 양지 / 버섯 두부 / 호박 / 고추장 / 고춧가루 밀가루 / 유부 / 대파 / 양파 계란 / 마늘 / 생강 / 소금 / 후추 |
두부 등 귀한 식재료와 더불어 여러 가지 식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곰보추탕과'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추두부탕’은 상당히 닮아있다.
다만, <오주연문장전산고> 시절에는 대파, 양파가 없었고, 더욱이 양지, 두부, 밀가루, 유부, 계란, 후추는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통은 가져가되, 시절이 흘러감에 따라 추어탕에 들어가는 식재료가 다양해진 것이다.
노포 #2 '용금옥' |
서울의 추어탕 노포인 ‘용금옥’의 추탕도 두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추두부탕’과 닮아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모되었다.
우선, 물을 끓이면서 미꾸라지를 두부 속으로 넣는 것은 하지 않는다. 실제 이 과정을 해보면 미꾸라지가 두부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추두부탕’에 나오는 두부는 연두부 혹은 순두부다. 미꾸라지는 부드러운 두부에는 숨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두부에는 숨어들지 못한다.
또한 미꾸라지가 들어간 두부를 썰어서 전을 부치는 과정도 번거로워 생략되었다. 아무리 전문식당이라고 해도 두부를 썰어서 전을 부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또한 시간이 지나며 레시피가 뒤섞여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만든 추어탕인 ‘통추’, 곱게 갈아 넣은 추어탕인 ‘갈추’가 동시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