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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서 구현하는 남도의 맛, <고운님> 정춘근 대표
[식당밥일기] #외식경영 #성공한 외식인 생생스토리 #8편 #남도음식 #고운님 #해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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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경영 개선전문가 식당밥일기

성공한 외식인 생생스토리 8


강남에서 구현하는 남도 오리지널의 맛,

<고운님> 정춘근 대표를 만나다!




남도 젓갈처럼 곰삭은 삶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춘근 대표의 삶의 여건은 계속 안좋아졌다.

차남이었던 정춘근 대표는 공부를 배우고 돈을 벌어야 했기에 형 친구의 주선으로 청소년 지도 단체에 가입했다.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고 밤에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약이 심해 3개월 만에 그곳을 뛰쳐나왔고, '돈이라도 벌어보자' 하여 간판집의 페인트공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고향친구가 찾아와서 공부할 길을 다시 찾아보라고 조언하고 갔다. 정대표는 체계적으로 일과 공부를 병행하려면 서울이나 광주의 실업계 고등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간판집 사장이 놓아주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밤중에 옥탑방에서 밧줄을 타고 몰래 빠져나와 광주 집으로 갔다. 광주에서도 간판집에 들어가 일하면서 중등, 고등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차근차근 공부한 덕분에 무난하게 합격했다.




가장으로서의 삶의 시작


당시 정 대표의 형은 음악감상실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형을 도와 지배인으로 관리 업무를 전담했다. 고객 응대 점포 관리 요령을 그때 처음 배웠다. 음악감상실에서 일한지 몇 년이 지났을 무렵 결혼과 함께 근처 당구장을 인수해서 독립했다. 어느덧 25세의 청년이자 가장, 그리고 사장님이 됐다.




놓치 못한 공부의 끈


독립과 함께 그제서야 고통스러웠던 10대 시절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손님으로 종종 찾아오는 대학생 후배나 친구들 모습을 볼 때면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결국 1986년 광주경상대학(현, 광주대학교)에 진학, 당구장 운영과 학업을 병행했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을 하기도 했다. 바쁜 와중에 당시 창업 트렌드에 따라 당구장을 호프집으로 바꿨다. 500㏄ 생맥주와 안주로 돈가스를 팔았는데 장사가 꽤 잘 됐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학생회장을 하면서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모으지는 못했다.




여러 번의 기회와 좌절들


1990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호프집도 정리했다. 그리고 매각 대금으로 후배와 함께 무역 회사를 차렸다.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회사였다.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엉뚱한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그 시작은 과거 광주 전남지역 학생회장단(남대협)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 보안법 수배자 선배도 참석한 것이 관계당국에 알려진 것이다. 이 때문에 정 대표도 불고지죄로 수배자 신세가 됐다. 출근은 물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숨어 지냈다. 더는 못 견디고 6개월 뒤 자수했지만 이미 회사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한 달을 시달린 끝에 검찰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돌아갈 회사가 없어진 정 대표는 형과 함께 당시 붐을 이뤘던 가라오케 업소를 열었다.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 업장을 3개로 늘렸다. 예전처럼 정 대표는 내부 관리를, 형은 대외 업무를 처리했다. 사업이 순조롭자 형은 아이템을 패션, 외식, 숙박업까지 넓히고 중국 진출도 밀어붙였다. 자금 수요가 늘면서 형은 정 대표 아파트와 당좌까지 담보로 잡혀 은행 대출을 받았다. 잘 나아가던 사업은 중국 현지 파트너와의 불협화음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화병이 생긴 형은 설상가상 간암 선고를 받고 얼마 뒤 사망했다.





포기하지 않고 재기를 꿈꾸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대형 예식장을 끼고 영업을 해 큰 돈을 번 소고기 전문점 주인이 공실이 된 식당을 공동으로 운영해보자는 것이었다. 예식이 없는 평일 매출까지 올려보려는 심산이었던 것.

1995년에 식당 문을 열었는데 하루 매출이 무려 1200만원에 달할 정도로 잘 됐다. 식당은 성업이었지만 정 대표 개인은 당좌에 돌아온 2000만원을 갚지 못해 부도를 냈다. 동업자에게 폐 끼치기 싫어 3년 만에 식당을 그만두고 나왔다. 가라오케는 형의 후배에게 넘겼다. 집도 절도 없어진 정 대표가 얻은 건 신용불량자 딱지 한 장뿐이었다.

죽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재기를 꿈꿨다. 광주 바닥에서는 얼굴이 알려져 막노동을 하더라도 서울에서 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고운님>으로의 첫 걸음


1999년, 드디어 형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에 창평국밥 전문점 <창평국밥 고운님>을 열었다. 서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었다. 26㎡(8평) 규모의 작은 식당이었지만 인테리어에서 남도 시골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간판에 ‘창평국밥’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국물은 하남 산골짜기의 맑은 샘물로 정성껏 끓였다.

직접 철가방도 들었다. 빌딩 경비실에서 냄새 난다고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했다. 정장으로 차려입고 국밥을 배달하자 경비도 아무 말 못했다. 정 대표가 정장을 차려입고 식당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처음에는 국밥+술안주 형태의 간단한 메뉴 구성으로 출발했는데 손님들 요청으로 메뉴가 하나 둘 늘어났다. 홍어를 시작으로 차츰 해산물 메뉴가 추가됐다. 그때마다 손님들 호응도와 매출도 늘어났다. 이쯤 되자 ‘내가 국밥만 팔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한 고향 선배의 “왜 이 좋은 음식으로 여기서 고생하느냐? 강남에 가면 돈 더 벌 텐데”라는 말이 정 대표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정 대표도 내심 그 말에 동의했다. 돈이 없어 마음뿐이라고 했더니 선배는 3000만 원짜리 어음을 선뜻 내줬다. 그러나 어음할인이 되지 않아 어음을 다시 선배에게 돌려줬다. 그 뒤 정 대표의 의지를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무려 7000만원을 차용증 없이 빌려줬다.

그 돈으로 2003년 강남 논현동에 남도음식 전문점 <고운님>을 차렸다. 간판에서 ‘창평국밥’이 빠졌다. 남도음식 전문점을 표방한 첫 걸음이었다.




식당을 정리하고 차린 밥집, 결국...


장사는 기대만큼 잘 됐다. 늘어난 매출만큼 육체적 피로도 역시 증가했다. 메뉴가 여럿이고 반찬 가짓수도 많다보니 시장보기, 재료 준비하기, 조리, 서빙 등 일이 많고 힘들었다. 심신이 지치자 식당을 정리하고 작은 밥집이나 하나 차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을 고향 선배에게 넘겼다.

그리고 매각대금으로 일산과 분당 쪽에 밥집 자리를 알아봤다. 돈이 부족하여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부동산중개소에서 연락이 왔다. 적당한 자리에 적당한 점포가 나왔다는 것. 지금의 <고운님> 자리였다.

그 자리에 담양식 갈비 전문점인 <대나무갈비>를 창업했다. 담양식 갈비는 주방에서 구워 내가고, 추가 주문하면 굽는 시간이 15분이나 걸렸다. 즉석구이를 선호하는 서울 고객에겐 안 맞는 갈비였다. 주가 주문 시 중간에 식사 리듬이 끊기는 것도 불만 요소였다. 결국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임차인이 자주 바뀌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던 건물주는 정 대표를 붙잡았다. 어느 임차인보다 점포를 깨끗이 관리하고 속 썩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좀 더 오래 장사해주길 바랐다.




다시 재단장한 <고운님>으로


2008년, 다시 점포를 재단장해 원래의 <고운님>으로 돌아갔다. 전에 <고운님>을 매각했던 고향 선배에게는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운님>은 남도의 토속 음식을 기반으로 한 해산물 전문점이다. 정 대표가 자신의 유년시절 고향에서 몸으로 체험했던 맛과 식재료를 밑절미 삼아 음식을 만든다.

계절이 바뀌면 바다의 환경도 채취하는 해산물 종류도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고운님>의 상차림도 달라진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자연산 생굴, 완도 간재미(가자미), 벌교 참꼬막이 제 맛을 낸다. 단골 중에는 고향의 맛을 찾는 남도 사람들뿐 아니라 향토색 짙은 남도 음식을 즐기려는 일반 고객도 많다.


손님이 불어나면서 <고운님>도 점포가 세 개로 늘었다. 포스코 본점삼성역점, 그리고 한우곱창 전문점인 <고운님 한우곱창>이다. 아내와 두 아들 등 네 식구가 가족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 세 점포 모두 ‘요구하기 전에 먼저 챙기자’는 정춘근 대표의 고객제일주의 정신으로 운영한다.




강남에서 구현하는 남도의 맛!


어머니 손맛 물씬 풍기는, 곰삭은 맛의 남도 음식. 감칠맛 넘치는 다양한 반찬들. 손님 입장에서는 더 없이 행복한 밥상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수고해야 한다.

갈수록 원재료 단가가 올라가고 산지 환경에 따라 수급이 불안정해지는데, 그것을 가격에 반영하기는 어렵다. 정 대표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고운님>과는 별도로 수익률 높은 면식 전문점을 창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어느 날 칼국수 집에 갔다가 살짝 충격을 받았다. 달랑 김치와 칼국수뿐인데 8000원이었다. 나는 국이나 탕에 아홉 가지 반찬으로 차린 밥을 9000원 받고 있는데. 물론 단순 비교이기는 하지만 외식업 경영자로서 효율성과 수익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 분야의 공부를 진지하게 좀 더 해볼 생각이다.




식당경영 개선전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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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외식인 생생스토리


7편 - 육회 전국 맛집 1등, <편대장영화식당>편미애 대표


2022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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