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외식인 생생 스토리 #5
시골 소년, 3.5평 만두집에서 시작하여 프랜차이즈 회사를 세우다!
<스타덤플링> 고석환 대표
꿈 찾아 돌아갔던 바닷길 같던 인생⛵
강원도 동해안 작은 포구에서 가난하게 자란 고석환 대표는 1992년 부산 해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항해사가 되어 전 세계 항구를 누볐다. 또래 친구들보다 서너 배의 급여를 달러로 지급받았지만, 근사한 횟집을 운영해보고 싶은 꿈이 남아 있었다.🐟 그 횟집은 가난한 소년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인생의 목표였다. 3년간의 의무 승선 기간을 채우고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배에서 내렸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의 유명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치열한 노력 끝에 6개월 만에 한식, 양식, 일식 자격증을 땄다. 수료 후 신사동의 동원참치집 주방에 들어감으로써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순탄하지 않았던 창업의 길
갑자기 들이닥친 IMF 외환위기로 인해 고 대표는 다시 배를 탔다. 🛶
3년간의 두 번째 선상 생활을 마쳤을 때, 마침 부산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던 고 대표의 매형이 그를 불렀다. 창업하려면 현장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고대표는 매형 후배가 운영하는 술집의 관리인으로 들어갔고 주인은 고 대표에게 지분 50%를 주면서 경영을 위임했다. 그는 얼마 후 나머지 50%의 지분마저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고 떠났다. 하지만 새 동업자는 고 대표 모르게 큰 돈을 대출받고, 야반도주해버렸다. 고 대표는 7,500만원을 대신 갚고 술집을 정리해야 했다. 😨
만두와의 첫 만남🔎
2004년 봄, 남은 돈으로 작은 중식당을 차렸다. 이때 처음 만두🥟를 만났다.
만두 빚는 법도 익혔고, 장사도 잘 되었지만 배달이 문제였다. 배달원들이 제멋대로 결근하고 근태가 엉망이었다. 배달 대행업체가 없던 때여서 고 대표의 고민은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골머리를 앓던 끝에 ‘차라리 만두 장사나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중국집 <딴따루>는 만둣집 <미성 왕만두>로 간판이 바뀌었다. 1,000원짜리 왕만두와 찐빵 맛에 부산 사람들은 환호했다.👏🏻 고객 반응에 고무된 고 대표는 내친 김에 서울에 진출해서 제대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2008년, 종로3가에 점포를 열었다. 매출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 반 년 만에 종로3가 점포를 넘기고 의정부 중앙시장에 새 점포를 얻었다. 옮긴 점포 매출도 별로 나아지지 않아 다시 서울 불광동으로 이전했다. 불광동 역시 신통치 않기는 의정부 가게와 매일반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좋은 입지를 얻기 위한 모험!
- 유동 인구가 많은 곳?! 삼고초려 끝에 얻은 3.5평 가게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까 고민 중에 아는 선배가 조언을 해줬다. “장사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해야 하고 미아삼거리가 좋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
버스를 타고 직접 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한 정거장 전인 길음역에서 신호대기로 잠시 버스가 정차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서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게 아닌가?
버스에서 내려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펴봤다. 👀누가 봐도 최고의 자리에서 피자를 만들어 팔고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입지라면 해볼만 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집 주인에게 괜찮은 조건으로 피자 가게 자리를 넘겨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일시불로 5,000만원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두 달 만에 점포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고 대표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일종의 전전세 개념이어서 만일 건물주가 건물을 팔면 5,000만원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또한 만두 장사가 시원치 않으면 돈만 날리는 꼴이 되고 만다.
👨💼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위험과 손실이 따르더라도 꼭 이루고 마는 성격이다. 이런 성향이 가끔 낭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고비의 순간에서 성공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승부사 기질로 얻은 3.5평 점포는 새 단장을 마치고 만둣집으로 탄생했다. 2009년 8월, ‘내고향 왕만두’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작했다. 고 대표는 개점을 앞두고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근심은 기우였던 것, 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더 높이 나아가기 위한 시도들, 성공과 실패
-프랜차이즈 가맹 사업, 외식업 공부,해외진출 등
사실 만두가 달라진 건 없었다. 종로, 의정부, 불광동에서 팔았던 만두를 길음동에서 팔았을 뿐이다.
고 대표는 점포의 입지가 장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절감했다. 사업에 한 번 불이 붙자 자연스럽게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으로까지 확대됐다. 2010년부터 탄생한 <내고향 왕만두> 가맹점은 현재 50~60개 점에 이른다. 사업의 크기가 커지면서 새로운 변신에 대한 압박도 그만큼 커졌다. 고 대표는 자신의 역량을 향상시키고자 만학도로 대학에 들어가 외식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
또한 사업 기회를 늘리고 성장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템의 다양화와 해외진출도 모색했다.🤠 2012년에는 일본 오사카에 점포를 개설했고 이듬해에는 호주 시드니에 전수창업 형태로 진출했다. 2014년에는 만두 뿐 아니라 냉면 등 면류🍜를 결합한 형태의 <미스터 냉면>을 개점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일본 오사카 진출은 2년 만에 3~4억원의 손실을 보고 철수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과 합작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큰 교훈을 얻었다.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지, 투자 손실이 아까워 손을 못 떼면 더 큰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배웠다.
브랜드의 성장,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브랜드 이원화로 재통합, 생산-유통-판매-마케팅 통합 작업
고 대표는 2020년부터 CI(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 통일화)와 BI(Brand Identity, 브랜드 이미지 통일화)작업을 해오고 있다.
‘스타덤플링’이라는 회사 이름 아래에 ‘고석환 손만두’, ‘고씨네 만두공방’, ‘내고향 만두&전골’ 등 3개 브랜드를 운용하고 있었다. 고석환 손만두를 기반으로 프리미엄급으로 격상시킨 브랜드가 '고씨네 만두공방'이고 전골을 특화한 브랜드가 '내고향 만두&전골'이다. 이처럼 아이템에 따라 삼원화됐던 기존 브랜드를 판매 방식에 따라 이원화하려 한다.
즉 테이크아웃 전문점은 '훈장만두 A타입', 홀 판매 점포는 '훈장만두 B타입'으로 정리 중이다. ‘훈장만두’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재통합하는 것은 경쟁업체의 진입장벽을 높이고, 장기적 마케팅 관점에서 홍보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이름만 바꾸는 게 아니다. 사업 구조도 한 단계 높인다.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한 매장 운영 외에 소, 피, 육수, 프리믹스, 만두 완제품 등을 외식업소에 납품하는 유통사업도 본격화한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재료들을 직접 생산했는데 재고·관리의 부담을 떠안는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핵심 재료인 만두소만 직접 생산하고 나머지는 OEM 방식으로 생산한다.
🕵OEM방식이란?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의 약자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이라 부른다. 생산을 주문한 업체에서 OEM 업체에 어떤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면, OEM 업체는 고객사가 요구한 대로 똑같이 만들어주고 제품을 납품하게 된다. |
외주 품질관리는 철저히 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생산부문은 별도의 법인으로 독립시켜 전문성과 생산성을 높일 계획이다. 고석환 대표는 이런 작업들이 마무리 되면 생산-유통-판매-마케팅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스타덤플링>으로 새롭게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고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스토리를 마무리했다.
👨💼“사업 규모는 커져도 수제만두라는 기본 정체성과 만두 맛은 지킬 것이다. 오전에는 공장이 쉬고 오후에 생산해 밤과 새벽에 배송하는 것도 그래서다. 고객은 맛이 없으면 한 순간에 등을 돌린다. 경영에서 늘 제품 개발과 연구를 중심에 두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허들을 조금씩 높여왔다. 어느 날 너무 높은 허들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넘어져봐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그 자리일 테니까 다시 극복할 수 있다.”
4편 - 아침에 파는 해장삼겹살, <시골 생고기> 김충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