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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119
짜장면에 대한 오해와 진실 - 2편
[황광해] #음식이야기 #중식코스요리 #식사 #공화춘
황광해
음식 인문학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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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에 대한 오해와 진실
2편 - 공화춘이 짜장면의 시작이다?


📒 30초 미리읽기

◾ 중식 코스요리에서 짜장면이 그닥 귀하지 않은 이유는?◾ 구글도 모르는 짜장면과 공화춘의 진실◾ 공화춘의 창업주, 우희광의 이야기




짜장면은 진화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한국식 짜장면, 한식 짜장면은 여러 종류로 진화했다.
간짜장, 삼선짜장, 유니짜장, 쟁반 짜장, 옛날짜장 등이다. 이 모든 짜장면은 모두 한국 짜장면이다.




유니짜장면 🍜

아직도 유니짜장면을 중국 음식으로 여기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그렇지 않다. 유니짜장면은 그야말로 ‘MADE IN KOREA’다. 대만 타이페이의 음식점들은 아예 ‘한국식[韓式] 검은 유니짜장면’이란 선전 문구를 내걸고 유니짜장면을 메뉴로 내놓는다. 중국인들, 대만인들 모두 유니짜장은 한국식 짜장면이라고 못 박는다.

간짜장 🍜

간짜장도 마찬가지다. 간짜장은 짜장을 볶는 걸 원칙으로 한다. 양파 등을 넣는다는 점은 중국식 자장미엔과 다르지만, 첨면장, 춘장을 볶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한국과 중국의 합작품이라는 게 정확하다. 인력이 부족하고 어차피 단가가 그리 높지 않으니 간짜장을 별도로 내놓는 가게는 나날이 줄어든다.

삼선짜장, 쟁반짜장, 옛날짜장은 애당초 이름부터 한국식이다.



중국식 코스요리의 짜장면


중식당, 짜장면집은 최근에 나온 이름들이다. 1960, 70년대에도 중식당의 이름은 ‘청요릿집’이었다. 식당이 아니라 청요리다.

청요리는 중국요리다. 청요릿집에서는 식사를 파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 요리를 팔았다. 짜장면, 짬뽕 등 면 음식과 여러 종류의 만두 등은 요리가 아니라 식사다. 가격이 낮으니 코스요리의 마지막인 식사를 선택할 때 고르는 품목이었다. 중식당들이 짜장면을 소홀하게 대하는 이유다.



지금도 남아 있는 청요리, 중국식 코스 요리는 청나라 말기 정형화되었다고 알려졌다. 냉채류를 에피타이저로 먹고 고기, 해산물 요리와 함께 술을 마신다. 식사 후 마지막에는 디저트, 후식을 더한다.


청요릿집은 서민들이 드나들기엔 부담이 된다. 부호들이나 지주, 권력자가 이용하던 공간이 바로 술집 요릿집, 한식, 중식, 화식(和食, 일식) 요릿집이었다. 청요릿집은 그중 중식 요릿집이었고, 이런 청요릿집은 1960, 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오히려 짜장면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청요릿집 코스 요리의 마지막에 자리한, 가격이 싼 ‘식사’ 중 하나였다. 메인 요리가 청요리의 중심이었다. 서민들도 쉽게 접하는 짜장면, 중화우동(초마면, 짬뽕), 만두 등은 여전히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천 제물포, ‘공화춘’이
짜장면의 시작?


“인천 ‘공화춘’이 짜장면의 시작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이렇게 말해도 여전히 짜장면의 시작은 인천 ‘공화춘’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구글에서 볼 수 있는 ‘공화춘’에 대한 설명도 그렇다.

🔎 공화춘은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하는 옛 중화요리 식당 건물이며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46호이다. 1912년에 개업한 공화춘은 대한민국에서 짜장면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짜장면은 임오군란 무렵, 청나라 군대를 따라 한반도로 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을 통하여 한반도로 전래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중국에는 ‘자장미엔’이 있었다. ‘공화춘(共和春)’에서 개발, 판매하였다는 표현은 틀렸다. 짜장면은 오래전부터 중국에 있었던 가정 음식이다.




💬 기존의 음식을
한반도에 온 중국인들이 새롭게 개발했다?

모순이다. 틀린 말이다.

임오군란은 1882년에 있었다. ‘공화춘’은 1912년 문을 열었다. 임오군란과 ‘공화춘’의 시기는 약 30년 편차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짜장면을 먹었다. 제물포의 개항은 1880년 언저리다. 지금도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일본과 중국, 청나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역에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 지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계 지역이 있을 정도로 청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무엇을 먹었을까? 가난한 서민들은 만두, 짜장면, 초마면(炒嗎麵) 등을 먹었을 것이다.


💬 길거리 음식을
공화춘이 식당 메뉴로 넣었다?

이 주장도 틀렸다.

‘공화춘’은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었다. 서민적인 숙박시설이었지만, 주력 메뉴는 요리 중심이었을 것이다. 식사 메뉴 중 하나로 짜장면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없다. 이미 ‘공화춘’의 값싼 식사 메뉴에는 짜장면이 있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가난한 중국 서민들은 부두 노동자로 살았다. 집이 가까운 이들은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면 되지만, 모든 중국인이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는 없다. 동료들과 더불어 부둣가에서 싼 점심을 사 먹었을 것이다. 리어카, 자전거 등에서 물을 끓이고, 현장에서 바로 국수를 뽑아 간단한 점심을 만들어 파는 이들도 많았다.

이른바 ‘리어카 짜장면’ 혹은 ‘자전거 짜장면’이다. 불과 10년 전에도 트럭에 제면기를 싣고 다니면서 국도변에서 ‘즉석 짜장면’을 파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공화춘은 어떤 곳인가?


‘공화춘’은, 이것도 불확실하지만, 1912년 무렵 문을 열었다. ‘공화춘’의 창업주 우희광(于希光, 1886~1949)은 그 이전에 ‘산동반점’이라는 식당, 숙박업소를 운영했다. 우희광이 20대 초반의 나이에 ‘산동반점’을 창업했고, 중화민국의 건국을 기념하여 가게 이름을 ‘공화국의 봄=공화춘’으로 바꿨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산동반점’이나 ‘공화춘’ 모두 숙소와 간단한 음식을 파는 공간이 있는 ‘서민형 호텔’이었다. 배를 타고 제물포-산동성 청도/위해를 오가는 중국인들이 상시적으로 사용하는 숙소였다. 물론 식당은 아니었다. 가격이 싼 숙소이니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놓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여기서 내놓은 음식 중에 하나가 바로 짜장면이었다. 짜장면이나 초마면, 만두 등을 모두 제공했을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중식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 마지막 식사 코스에 짜장면이 등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현재 ‘공화춘’을 운영하는 이는 창업주 우희광 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80년대 초반, ‘공화춘’을 휴업 혹은 폐업하고 우희광 후손들이 대만으로 이주했을 무렵 브랜드 ‘공화춘’을 다른 이가 등록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신승반점’을 운영하는 왕애주 대표가 ‘공화춘’의 창업주 우희광의 외손녀다. 우희광 씨의 막내딸 부부는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중식당을 운영했다. 둘 사이의 딸이 바로 왕애주 대표다. 굳이 ‘우희광의 공화춘과의 연관성’을 찾는다면 외손녀 왕애주 대표의 ‘신승반점’에서 찾아야 한다.




‘공화춘 짜장면’ 이전에 중국인 가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짜장면을 상업적으로 파는 가게는 ‘공화춘’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화춘’의 전신인 ‘산동반점’에서도 짜장면을 팔았을 가능성이 있다. ‘공화춘의 짜장면 시작’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1960년대부터 활발하게 팔린 짜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짜장면의 화려한 변신 이야기, 다음 편에서 계속된다.


음식인문학 전문가
황광해 의 짜장면 이야기 🍜


👉 중국식 짜장면과 한국식 짜장면


2022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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