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산나물은
싸구려가 되었을까?
📒 30초 미리읽기◾ 우리나라 산나물 문화가 무너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왕의 음식과 대비되는 서민 음식, 산나물◾ 사람이 먹지 못하는 잡초로 전락한 산나물 |
💡 초근목피란?‘풀뿌리 나무껍질’ 이라는 의미로, 먹을 것이 없어 목숨을 연명할 때 먹는 험한 음식 |
언제부터, 고급스러웠던 산나물이 한낱 풀때기가 되었을까? 왜, 산나물이 한낱 싸구려 식재료가 되었을까?
오늘은, 그 마지막 이야기다.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한반도의 풍요로움을 알았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로 한반도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일본도 마찬가지.
▲ 4대 기근의 마지막인 덴포대기근 당시, 홍수, 한파 등 자연재해가 있었고 각 지역에서 숱한 반란이 일어났다. 4대 기근 중에도 가장 참혹했던 덴메이대기근도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덴포대기근에도 시대 후기인 덴포 4년(1833)~10년(1837)에 걸쳐 일본 전국에 발생한 대기근 덴메이대기근에도시대 덴메이 연간에 일어난 기근 사태로, 에도 4대 기근 중의 하나이며, 일본 근세사상 최대의 기근 |
그러던 중, 넉넉하게 살았던 선진적인 한반도로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조선의 왕과 귀족층, 잘 사는 이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 “너희들 왕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내 앞에 차려라”
이렇게 말하는 무뢰배들도 당연히 있었다.
안순환은 조선의 졸부들과 일본인들 구미에 맞는 ‘왕의 음식’을 술집 요리로 내놨다. 글의 후반부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른바 ‘궁중료리’다.
길지만, 일제강점기 상황부터 설명해야 하는 이유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으로,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경술국치다.
▲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로 몰려왔다. 먼저 받아들인 서구문물을 앞세워, 일제는 한반도 전역을 식민지화, 착취했다. 정치, 군사적 측면과 아울러, 사회, 경제, 일상적인 생활도 일제가 철저히 지배했다.
명치유신 이전에는 한반도 문물이 일본 열도보다 훨씬 앞섰다. 정조대왕 시기에는 경상도 일대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쌀을 주고 은을 받았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도 군산항을 통하여 쌀을 가져갔다. 만주 일대를 통하여 중국산 밀을 모으고 경부철도로 운반, 구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강탈이었다.
‘궁중료리’는 왕의 음식이 아니라 국가, 조선의 음식이다. 외국 사신이 왔을 때나 궁중의 행사 때 내놓던 음식이다.
남북회담을 할 때, 외국 국가 원수가 왔을 때 내놓는 음식을 ‘대통령의 음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 대통령의 음식이 아니라 국가의 음식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매국노 안순환은 조선 궁궐의 행사용 음식들을 ‘왕이 먹는 음식’이라고 부르며 한낱 술집의 안주로 내놨다.
매국노이자 친일파, 술집 경영자였던 안순환 같은 이들이 ‘명월관’ 같은 술집을 차렸다. 명월관에서는 여자의 웃음과 담배, 양주도 팔았다.
🏡 명월관종로구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터에 위치, 대한제국기 궁중 요리를 전문으로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 |
조선, 대한제국보다 훨씬 힘이 강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들, 러시아, 청나라, 일본의 왕실에는 '궁중음식'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간단하다. 제국의 군홧발에 짓밟혀 갖은 수모를 다 겪고 끝내는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될 정도로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졸부들, 정치 모리배들, 일본 사무라이 졸개들까지 대놓고 서구 열강이나 일본, 러시아 등 힘이 센 나라에 가서 “너희 왕이 먹던 음식 가져와 봐!” 라고 할 수 없었다.
만만한 조선에서만 사무라이나 시정잡배, 건달들이 ‘왕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조선은 이미 짓밟혀 항거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고종이 먹는 음식들을 차린 술집’들이 넘쳐났다.
‘궁중음식’은 슬픈 이름이다. 우리 국왕이 먹었던 한식의 맥을 잇는 자랑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조선의 왕들도 행사 때가 아니면 ‘명월관’의 술집 요리 같은 화려한 음식을 만날 수 없었다.
궁중료리 혹은 궁중의 음식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왕의 음식과 서민의 음식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일제는 간교하게 떠들었다.
💬 “왕과 고관대작들은 궁중 료리 혹은 궁중의 호화로운 음식을 먹고, 일반 서민들은 산에서 먹지도 못하는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고 산다”
일본인들은 산나물을 우리처럼 폭넓게 사용하지 않는다. 버섯과 몇몇 나물들을 사용한다. 대기근의 시대에도 일본인들은 산나물을 우리처럼 먹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산나물을 잘 모른다. 지금도 식용으로 삼는 산나물은 제한적이다. 그들이 보기엔 조선의 서민들이 한반도의 산과 들을 다니며 이런저런 나물을 채취해서 먹는 것이 어색했을 것이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잡초를 뜯어서 먹는다고 믿었다. 마침, 한반도는 저들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이다.
💬 “썩어빠진 조선의 왕과 고관대작들은 주지육림에 빠져 살고, 가난한 서민들은 초근목피,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캐 먹고 산다.”
이 표현은 곧 이렇게 바뀐다.
💬 “너희들을 착취해서 잘 먹고 잘사는, 썩어빠진 조선의 왕이나 고관대작보다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
이 엉터리 문구는 일제, 해방 이후의 가난한 시절을 지나며 끊임없이 전달, 세뇌, 교육되었다.
일본인들은 악의적으로 한반도의 지배층과 서민을 모두 낮춰보았다. 그들은 산나물을 모른다. 한반도 지배층은 싸움질이나 하고, 호의호식한다. 서민들은 먹지도 못하는 잡초, 풀때기, 초근목피로 연명한다.
지긋지긋한 ‘초근목피’는 이렇게 일본인들에 의해서 완성되었고, 우리는 산나물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돌아가신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1925~2003년)의 ‘들판 이야기’ 중 일부다. (신동아, 2003년 2월호)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
산나물은 우리 음식, 한식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