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비회원으로 이용중입니다. 로그인을 하시면 더많은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로그인하기
회원가입하기
사장님119
불고기가 궁금하다 - 3편
[황광해] #음식이야기 #난로회 #기마민족 #고기문화
황광해
음식 인문학 전문가
구독자 65
#음식이야기
#한식
#지역특산물

홈 보러가기
            



불고기가 궁금하다 | 3편
북방에서 전한 '난로회'가 불고기의 시작이다




고기 문화는 북방에서 전해진다. 정확하게는 북방 기마민족을 통해서 전해진다.

불고기도 마찬가지다. 북방 고기 문화가 한반도로 전해지면서 조선 후기 불고기가 시작된다.

조선은 농경 국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다. 농사를 지어 생산된 곡물로 먹고 산다.

국가에 내는 세금도 곡식이다. 국가는 병역, 세금으로 유지된다. 조선은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선조들의 농사로 살았다.

문제는 북방이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 북방 기마민족이 있다. 농사가 아니라 수렵, 목축으로 먹고산다. 짐승을 기르고 사냥을 한다. 육식 위주의 문화다.

백정은 어떤 세금을 낼까?

‘도축하는 노동’이 바로 세금이다. 임꺽정의 아버지는 백정이다. 아들 임꺽정은 아버지의 도축을 돕는다. 관청에서 소를 주면 그 소를 도축해서 고기를 납품한다.

도축 노동력이 세금이다. 농사짓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




북방 유목 기마민족이
고기 문화를 전한다 🤲


조선, 중국, 왜가 모두 농경 위주의 국가들이다.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은 크게 둘이다.

몽골의 원나라는 몽골족이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만주족은 여진족이다. 만주족은 몽골족들과 연합하여 중국을 점령한다. 만주족, 몽골족은 북방 기마민족이다. 중국은 농경민족인 한족과 기마민족인 북방 민족이 번갈아 대륙을 통치했다.


농경 국가 한반도에 여러 번 북방 기마민족이 들어온다.

부여, 고구려의 후손인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로 와서 백제를 건국한다. 지배층은 북방 기마민족이고 피통치자 양민은 오랫동안 농사짓고 살았던 농경민족이다. 두 민족은 섞인다.




거란과 몽골이 침략한다.

모두 북방 기마민족이다. 이들도 음식문화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여러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거란, 몽골의 고려 침략 때 고기 문화가 전해 내려온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만주족 역시 북방 기마민족이다. 시간이 흐른 후, 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리면서 우리도 이들을 통하여 선진적인 유럽,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다. 실학實學의 다른 이름은 북학北學이다. 북쪽에서 전해진 실용적인 학문이 실학이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의 경제는 다시 부흥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을 휩쓸었던 대기근도 서서히 사라진다. 숙종, 영조, 정조의 시대를 지나며 조선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는다.


정조는 호탕한 군주였다. 할아버지 영조는 엄격한 군주였다. 금주禁酒, 금육禁肉을 철저히 지켰다. 청나라를 통해서 여러 문물이 전래 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기 먹는 문화다.

공식적으로 조선은 소고기를 ‘금육禁肉’이라 불렀다. 소는 농경의 도구였다. 소를 도축하면 이듬해 농사가 망한다. 소고기는 제사나 손님맞이, 국가의 행사 등에 사용했다. 조선 사회는 암암리에 ‘금육’ 유통이 잦았다. 18세기 후반, 기마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의 영향, 조선의 경제적 부흥, ‘금육’에 대한 국가 정책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고 한반도에 급속하게 고기 문화가 퍼진다.

📣 “불고기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음식을 본떠 만든 음식” 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바탕 야단이 났다.
불고기가 일본 야키니쿠(焼肉, やきにく)를 본떠 만든 음식이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엉터리다.

‘불고기=불에 구운 고기=구운 고기=야키니쿠’라니,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엉터리다. 조선 후기, 우리의 고기 문화, 고기 문화 발달 과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불고기는 야키니쿠와는 뿌리부터 다르다.




난로회, 불고기의 시작이다




불고기의 시작은 조선 후기의 ‘난로회煖爐會’다.

난로회는 난회煖會 혹은 난란회煖煖會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내내 고기는 수육이었다. 수육은 ‘숙육熟肉’이다. 생고기가 아니라 익힌 고기다. 익히는 방법은 찌거나 삶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이 남아 있는 수육, 혹은 닭고기를 푹 고거나 삶은 백숙白熟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수육과 닮았다.


난로회의 소고기는 구운 고기다.

고기를 굽지 않고 물에 삶거나 곤 것은 도구 때문이다. 석쇠를 만들 철사가 없었으니 대부분 찌거나 삶고 더러 번철燔鐵에 구웠다.
번철은 전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무쇠 뚜껑 같은 것이다.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17세기 말, 효종 때 죽었다. 그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한 정교한 석쇠는 보지 못했다.
<옥담사집> 중 “식칼을 잡고 회를 저며도 좋고/철정번(석쇠)에 얹어서 구워도 좋으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 중 ‘鐵井燔(철정번)’의 ‘(철)’은 쇠다. ‘철정’은, 쇠꼬챙이로 ‘우물 (정)’자 같이 짠 것이다. ‘(번)’은 굽는 것을 이른다. 정교한 석쇠는 없었다.


난로회는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정확하게 나타난다.

홍석모는 1781년생(정조 5년)으로 1857년(철종 8년)에 죽었다. 19세기 초, 중반 한반도의 고기 먹는 문화 난로회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난로회는 송나라 여원명이 쓴 <세시잡기(歲時雜記)>와 맹원로가 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등이 근거다.

이 자료에 의하면 난로회의 시작은 송나라다. <세시잡기>에 “연경 사람들은 10월 초하룻날에 술을 준비해 놓고 저민 고깃점을 화로 안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마시며 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동경몽화록>에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들이 난로에 피울 숯을 대궐에 올리고 민간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갖는다”라고 하였다.

난로회에 사용하는 도구는 화로같이 생긴 것이다. 테두리가 넓게 있고 중간이 움푹 파였다. 테두리에서 고기를 굽고, 파진 홈에 채소와 양념, 장을 넣고 끓인다. 고기를 구워 파진 홈의 양념에 찍어 먹는다. 홍석모보다 약 50년 앞선 연암 박지원(1737~1805년)도 <연암집> 제3권_공작관문호_만휴당기에서 난회를 설명한다. 이때 이미 고기 구워 먹는 일은 널리 퍼졌다.

📜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 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철립위鐵笠圍’는 군졸들이 쓰는 모자다. 쇠로 만든 테두리가 있는 모자다. 중국에서 유행한 난로회의 그릇과 닮았다. 중간에 홈이 파지면 화로 같고, 뒤집어서 중간 부분이 솟아오르면 오늘날의 불고기판과 같은 모습이다. 오늘날 불고기판은 이미 오래전에 한반도에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청국 사행(使行)이 빈번해지면서 새로운 소육(燒肉) 조리법인 난로회가 조선에서 유행하였다”는 내용도 남아 있다. 불고기 문화는 일제강점기 혹은 일본과는 관련이 없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에는 북방에서 시작된 고기 구워 먹는 문화가 널리 퍼졌다.


황광해 불고기 이야기
불고기가 궁금하다

👉 한반도 고기 문화의 시작 거슬러 올라가기!





2022년 06월 04일
캐시노트 가입하고
필요한 컨텐츠 알림받기
이전글
불고기가 궁금하다 - 2편
다음글
식당에서 시작하는 가정간편식 - 6편
공감 5
저장 6
댓글 0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