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고급 커피 시장을 열다,
<테라로사>로 보는 경영 인사이트-1편
작은 식당 운영에도 다양한 공부와 거시적 혜안 필요! <테라로사> 김용덕 대표에게 배우는 경영 인사이트 ![]() 커피를 잘 모르는 사장님들도 ‘테라로사’는 다들 한 번씩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국내 고급 커피 시장을 연 대표적인 브랜드지요. 시작은 2000년대 초. 강원도 강릉의 한 외곽 지역에서 100평대의 저택 같은 매장 <테라로사>를 열면서부터입니다. 자판기 커피나 믹스커피가 전부였던 한국에선 나름 독보적인 공간이었지요. 강릉 1호점을 시작으로 전국구로 매장을 확장하며 최상급 원두의 핸드드립 커피로 커피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 고급 커피 시장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테라로사>를 론칭한 김용덕 대표가 원래는 은행원이었다는 사실 다들 알고 계신가요? 평범한 은행원이 국내 명품 커피의 대가로 우뚝 서며 커피 시장의 버라이어티를 열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그 이야길 시작합니다. 이 긴긴 글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여러분은 새로운 인사이트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실 겁니다. |
연 매출 243억 원, 고급 커피 시장 개척
자판기 커피가 익숙했던 21년 전.
지금은 대중 커피가 된 아메리카노 조차 생소했던 당시에 케냐와 르완다, 과테말라, 에티오피아산 고급 원두로 핸드드립 해주는 커피라니!
‘과테말라로스 아구아카토네스’, ‘파나마토니-부르봉’, ‘코스타리카 카를로스’ 커피 명까지 생소해 매장 안까지 들어왔다가 메뉴판만 멀뚱멀뚱 쳐다보고는 그냥 나가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강릉 <테라로사>가 지역 명소로 자리 잡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테라로사가 알려진 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커피 마니아들에 의해서다.
전국의 명품 커피집을 찾아다니던 이들이 테라로사의 정보를 접하고 강릉까지 찾아온 것.
💡 “커피는 공간과 문화를 파는 산업이라고 하잖아요. 테라로사를 찾은 많은 커피 마니아들은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한 잔씩 골고루 주문해 음미하면서 건물 인테리어와 분위기에도 감탄했어요. 강릉이라는 소도시에 유럽 저택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게 그들은 좋았던 거죠. 일부 마니아들의 입소문으로 테라로사는 강릉의 명물이 됐어요.” |
테라로사는 2002년 강릉 본점을 시작으로 현재 서울 한남동과 이태원, 예술의전당, 광화문, 제주와 부산, 경기도 양평 등의 지역에서 매장을 운영 중이다.
매장마다 건물 구조와 인테리어를 완전히 다르게 구상했다.
🏛️ “규모나 건물 구조, 인테리어 요소뿐 아니라 미학적 느낌이나 동선도 제각각 달라요. 테라로사를 준비하면서 유럽의 유명한 건축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건축과 예술, 디자인에 대한 시각을 키웠어요. 그때 익혔던 미학적 감각이 테라로사 매장을 만들 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죠. 주변의 풍경과 주택의 모습,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사람들의 시선,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져요. 가구도 유럽 각국을 다니며 하나하나 사들인 것들이에요. 🌳 매장마다 느낌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테라로사를 찾았을 때 ‘가히 테라로사답다’는 감탄사가 나온다는 거예요(웃음).” |
특히 경기도 양평 서종점은 구식 한옥 건물을 감각적으로 디자인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들었고
부산 수영점은 고려제강의 철강 제품 생산 공장을 리뉴얼해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분위기를 구현했다.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산업의, 공업의' |
나는 분노감 때문에 커피를 시작했다
테라로사를 만들기 전 그는 21년간 은행에 다녔다. IMF 때 명예퇴직한 후 돈가스집을 운영했는데 당시 음식을 배우면서 와인을 함께 공부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커피 쪽으로 옮겨갔다.
👀 “충격이었어요. 국내 커피산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이렇게까지 낙후될 수가 있는 건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만 해도 좋은 커피를 수입해 대중이 즐겨 마시던 때였는데 우리는 고작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전부였거든요. 아메리카노가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도 몇 년 안 됐잖아요. 충격은 분노로 이어졌어요.” |
한국의 문명은 어느 정도 선진화됐는데 왜 아직까지 일부 먹고 마시는 문화는 수십 년이나 뒤처진 것일까. 와인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커피를 배우면서 그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노 비슷한 감정이었다.
바로 유럽행 티켓을 끊었다. 커피 문화를 꽃피운 곳. 그는 각국의 유명한 정통 커피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수십 잔의 커피를 마시다 보니 문득 원두가 궁금해졌다. 그때부터 전 세계 수백 개의 커피농장을 다니며 해콩의 냄새를 맡고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는 최상급의 원두를 선별했다.
⛱️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에티오피아의 하라 지역이었어요.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 목숨만 겨우 유지하는 커피나무가 대부분인데 어렵게 버티며 맺은 커피 열매가 한 그루당 고작 300~500g밖에 안 돼요. 양이 적으니 공급받긴 어렵죠. 맛있는 커피라기보단 애잔한 커피로 와 닿았어요.” |
악마의 음료가 인류의 음료가 되기까지
그에게 커피는 다 같은 커피가 아니다. 맛있기도 하고 때론 달기도 하며 어떨 땐 에티오피아에서 느꼈던 것처럼 애잔한 맛이 나기도 한다.
산지나 원두 종류별로 맛을 분리하는 학습의 차원을 벗어난, 그러니까 ‘구별’을 떠나 ‘차별’의 단계까지 온 것이다.
👄 “전 세계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 맛을 구별하고 또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원두의 품종을 찾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요. 와인이나 차를 비롯해 모든 음료의 역사가 기원전부터 시작하는데 커피는 그렇지 않죠.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지방에 살았던 목동 칼디가 커피 열매를 발견했다더라’ 같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도 800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까요. 터키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커피집이 생겼는데 그게 겨우 15세기예요. 164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 카페가 생겼고 이후 1760년 로마에도 카페가 생겨요. 그러니까 터키에 최초의 카페가 생긴 후 커피 문화가 유럽으로 퍼지기까지 200년, 유럽 전역에 커피가 보급되는 데는 120여 년이 걸린 셈이죠. 커피를 전 세계적으로 마시게 된 건 불과 150년이 채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그만큼 더뎠어요. 역사가.” |
커피는 이슬람 음료였다. 검은빛이 돌아 기독교에선 악마의 음료라 칭하며 마시는 걸 금기시했다. 👿
1605년 천주교와 교회의 주교들이 교황에게 악마의 음료를 마시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청원했을 때,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 8세는 커피 맛을 본 후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의 음료로 두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 음료에 세례를 내리노라!” |
☕ “유럽에 커피집들이 생기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에요. 종교나 정치, 사회적인 흐름 때문에 커피의 발달 속도가 한참 느렸던 거죠. 느린 시간에 비해 현재 커피 시장 규모는 몰라보게 커졌죠?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에 가장 영향을 받지 않고 누구나 즐기는 문화가 됐어요. 종교에서 말했던 악마의 음료가 대중의 음료, 결국 인류의 음료가 된 셈이죠.” |
스타벅스를 뛰어넘는 전략은?
명품 커피의 대가. 그를 두고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더러 미국에 스타벅스가 있다면 한국엔 테라로사가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2016년 테라로사의 연 매출은 243억 원.
하루 1,0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매장이 절반 이상이다. 전체 매출은 스타벅스와 비교할 바 아니지만 점포당 매출은 이미 두 배를 넘어섰다.
중요한 건 기업의 시가총액이나 규모를 떠나 국내 커피 업계에 미친 영향력이 스타벅스와 견줄 만큼 막대하다는 것이다.
😉 “그냥 저는 커피를 가지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스타벅스와 자주 비교당하기도 하지만 사실 스타벅스와 테라로사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아예 달라요. 스타벅스는 커피 품질이나 맛보단 브랜드와 공간을 파는 곳이고 테라로사는 커피 자체에 중점을 둔 브랜드예요. 서구적인 인테리어와 건축물의 예술적 감각도 커피에 더욱 집중하도록 하는 장치고요. 질적으로는 스타벅스를 뛰어넘었다고 자부해요.” |
💡 다음 시간에도 이어서 <테라로사>로 보는 경영 인사이트 2편을 소개하려 한다. |
외식경영 전문가 황해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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