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의 재산이 손자의 성공을 결정한다'
친구로부터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스물다섯의 나는 무슨 이런 어이없는 말이 다 있지라고 생각했다.
자수성가형 인물들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위인전이나 만화를 보고자란 내게는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졌다.
개개인의 열정과 노력만이 성과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작 일 년, 일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정작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 나 자신이라고. 공감하지 싫지만, 동의하기 싫지만, 인정하기는 지독히 싫지만 친구의 말이 맞는구나 깨달았다.
요새 카페&서점에서 손님들은 온통 '부동산' 이야기만 한다.
어느 네 조부가 손자에게 건물을 물려줬다느니, 얼마 전 분양한 아파트의 청약은 넣었는지, 애가 둘밖에 안되는데 특별공급 대상자는 되는지,
전세가가 얼마나 올랐다느니, 전세가를 맞추느니 대출을 받아 매매를 하겠다느니, 대출이 안 나와서 죽겠다느니, 매매가가 미친 듯이 올라서 근로소득으로는 어림도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공기 속을 떠돌아다닌다.
숨쉬기가 버겁고도 무겁다.
은행을 갔었다.
직업이 뭐냐고 묻길래 "자영업을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은행원은 매장의 매출이 얼마나 나오냐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다가, 옆에는 안 들리게 조용히 읊조렸다.
은행원은 얼마의 대출을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으로 물었다.
'얼마까지 되나요?' 은행원은 회사원도 아니고, 매출이 높은 것도 아니라서 아마 대출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개인신용대출은 안되냐고 묻자, 은행원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으로서 고정적인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닌 일반 자영업자.
그것도 매출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영업자에게는 신용도, 대출도 없었다.
며칠 뒤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저 멀리서 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나와계시는 부모님을 본다.
창문을 열어 "어떻게 알고 나왔어?"라고 묻자 "엔진 소리만 들어도 네 차인 줄 알겠다"라는 부모님이 참 반갑다.
주차를 끝내자마자 차에 있는 캐리어를 꺼내 집 안으로 옮기는 아빠를 보니 웃음만 나왔다.
"아빠, 그거 무거워!"
아빠는 듣지도 않고 축지법을 쓰듯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빈손으로 아빠의 뒤를 따라간다.
식사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부동산'이야기를 했다. 고작 듣기만 한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쏟아져 나온다.
요새 진주 집값이 예전 같지 않다느니, 내가 살집은 어디 있는 걸까, 무주택자인 데다가 자녀도 있는데 왜 분양은 안되는 거냐 하소연을 했다.
아빠는 그저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네 집은 아빠가 지어주는 건데..."라고 한 마디 할 뿐이다.
철딱서니 없는 딸은 "요새 누가 집을 직접 지어, 집을 사주면 모를까"라고 툭 뱉는다.
아빠는 "그렇네"라고 한다.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결혼할 때는 할아버지의 아빠가 집을 직접 지어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농사를 지으러 간다. 해가 뉘엿뉘엿 해질 때쯤 농사일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산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큰 돌들을 모아 산을 오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 중턱에 돌들을 쌓아놓는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천천히. 돌들을 잇고, 잇는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쌓아 올려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장가갈 때 그 집은 신혼집이 돼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빠는 팔 남매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추운 겨울 어느 날,
꼬꼬마였던 아빠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앞으로 두 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아빠의 손을 꼬옥 잡고 "언젠가 네 집은 내가 지어주마"라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는 아직까지도 아빠의 말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빠는 또다시 "돌을 이어다 네 집을 만들어주고 싶다"라는 말을 한다.
옛날에는 다 이렇게 집을 지었다고 말한다.
골조는 어떻게 잡는지, 돌은 어떻게 쌓는지 딸에게 구구절절 설명한다.
돈도 없고, 땅도 없고, 돌마저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어려운 일인지 잘 알면서도, 해줄 수 있는 건 직접 돌을 이고 몸으로 때우는 것밖에는 없어서, 그것뿐이라 그렇게 말해본다.
'조부의 재산이 손자의 성공을 결정한다'라.
성공이 무엇일까?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 내게 성공이 왔을 때 나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알아챌 수 있을만한 사람일까?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집을 지어주겠다는 약속, 끝내 못 지켜진 이 약속이 아빠에게 물려갔듯, 언젠가 나 또한 나의 아이에게 그 말을 되뇌고 있을 거란 직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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